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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해라.

이해하다, 이해함이란 무엇인가, 그것부터 따져보아야 하지 않겠던가. 깨달아 알다, 또는 잘 알아서 받아들이다, 그런 의미의 동사. 사전적으로는 그렇다. 비슷한 단어로 뭐가 있는가. 공감하다, 깨닫다, 받아들이다⋯ 하! 뜻을 나열하는 데에 무슨 의미가 있지? 해일과 캐빌 프로빈스, 그 둘이 주먹을 주고받는 행동은 결국 분노 따위의 감정을 해소하려는 몸부림에 가깝다. 그러니까, 지렁이가 밟혀 꿈틀대는 것에 아무 힘이 없는 것처럼. 지금 당신에게 '이해한다'라는 행위는 그런 일에 가까울 테지. 캐빌 프로빈스는 결국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그 행동의 원인이 망할 칵테일의 효과라는 것조차 알지 못하며, 그가 늘 내세우는 '감' 따위로, 눈 앞에 보이는 당신의 태도만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 실태라고. 해일, 알고 있는가. 이 남자가 얼마나 멍청하고 판단력이 흐린지를. 필히 인지해야만 할 것이다. 그는 그 단점을 왼손에, 장점을 오른손에 쥐고 무기로서 흔드는 전투광이니까⋯

가볍게, 가볍게 말이지. 야, 넌 진짜⋯ 사람이 좀 바뀐 게 아니네, 지금 보니까. 실은 있지, 이기적이고, 그따위로 굴고, 내가 무슨 피해를⋯ 그딴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거든. ... 넌 리피가 가볍냐? 난 아니거든. 지금의 네가 리피를 어떻게 생각하건, 나한테 리피는 더이상 그리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됐거든. 그러니까 네 말대로 가벼이 여길 수가 없다. 그만큼 주먹도 무거워지는 법이고⋯ 알지?

리피, 당연히 너 좋아하지. 근데 지금은 아닐걸. 장담하는데, 네가 원하는 대로 걔를 휘두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너도 알다시피, 리피는 강한⋯ ⋯뭐라고 했냐? 야, 야. 진짜 처 돌았지⋯

'내가 삶의 이유이자 희망이다' 하는,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웃음기 싹 빠지더라. 손 뻗어서는 멱살을 콱 잡는다. 그 흔들림이 전해졌을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 보이는 얼굴. 치켜뜬 눈은 검은 머리를 향한 분노로 점철되었으며 그 새파란 눈을 직시했다. 그녀의 것과 같은 색의 눈동자 따윌 불태우듯이⋯

네가 그따위로 굴게 놔두느니, 널 죽이고 내가 챙겨주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여기서. 야, 해일. 해일. 해일, 있잖아, 당연한 건 없어⋯ 내가 늘 말하는 '당연하다' 라는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섞인 거라고. 내가 화난 게 쓸모 없을 수는 있거든? 근데⋯ 네가 리피를 행복할 수 없게 만드는 걸 막는 건 쓸모 없다고 느껴지지가 않으니까 말이야⋯ 쓸 데 없는 체력 소모가 아니더라고, 이런 식으로 화내는 건⋯.

그래, 그래. 쉬러 왔지. 휴양지에서. 기껏 얻어낸 휴식 속에서 불화를얻어내는 건 바라지도 않던 일이다. 다만, 다만, 다만. 당신이. 당신의 상태가 이상한 것 따윈 아무래도 좋다. 다만, 다만, 다만. 리피가 그것으로부터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단 가능성이 생긴 다음부터는. ⋯더이상 신경삭 바깥으로 둔 일 이상으로 개입해야만 하는 이유가 생기더라. 가벼워진 마음, 가벼워진 관계. 무거운 것은 무엇인가, 감정은 무겁다. 감정은 외로운 지라, 늘 함께할 대상을 찾기 마련이다. 당신에게는 리피가, 리피에게는 다시 당신이. 당신과 리피의 관계에 스스로를 끼워넣은 적은 없다. 해일과 리피, 그들은 이미 그들만으로도 행복을 찾아 나갈 수 있는 이들이니까. 그럼에도, 그럼에도 이토록 분노하매 주먹을 쥔 까닭은, 가장 소중한 동료가, 가장 소중한 친구에게 흉질 것이란 확신이 들기 때문에. 캐빌 프로빈스의 분노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가장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에. 제 인생에 다시 없을 사람이기 때문에. 손바닥에 구멍이 나고 팔이 잘리고 몸을 쥐어뜯겨도 함께하고픈 사람이기 때문에. 희망을 다시 전하기 위해. 정의를 부르짖기 위해. 사랑을 되살리기 위해. 우정을 기워 붙이기 위해.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고하는 건 전우로서 친구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당신이 받아들이는 것 따윈 상관 없다. 왜냐면 제 기준에 지금의 해일은 틀렸으니까. 해일은 사랑하는 이를 상처입히지 않는다. 외려 사랑으로 감싸고 보듬어주며 스스로 찢어발기는 한이 있어도 타인을 적으로 두지 않는다. 하지만⋯

해일, 네 행태를 보라. 타의에 책임을 묻고 주도적 의지 따윈 파헤쳐진 흙 속에 잘 묻어두지 않았는가. 그러한 것들을 우리들은 회피라 부른다. 마주한 것을 고개 돌린 채 피해버리는 것을, 적어도 캐빌 프로빈스는 옳지 않다고 명한다. 기준은 무엇인가. 없다. 그토록 주관적인 기준의 판단 하에 당신은 틀렸으리라 확신하는 태도. 하지만 당신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 멍청함에서 나오는 올곧음이 그를 강하게 만든다는 것을.

야, 멍청아. ⋯하, 이젠 이름으로 부를 가치도 못 느끼겠어서. 미안하게 됐네, 멍청아. 이해한다는 게 뭔지 알고 하는 소리냐, 진짜. 사전적 의미부터 설명해줄까. 깨달아 알다, 또는 잘 알아서 받아들이다. 이 중에 네가 하고 있는 게 단 하나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거든⋯. 깨닫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고,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받아들이지도 못했잖아, 너는. 리피가 널 왜 사랑한 줄 알고는 있냐? ⋯희망, 네가 아득바득 붙잡을 필요도 없다 말하는 그 희망. 그걸 네가 말했기 때문에. 알겠냐? 리피에게 희망을 보여줬으니까. 리피가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으니까. 희망으로 일어설 수 있게 만들었으니까. ⋯멍청아. 남을 멋대로 일으켜 놨으면 그 책임을 지란 말이야⋯. 남의 세상을 넓혀놓고서는, 그러고 끝내고 싶다는 거냐, 진짜로.

마법소년이란, 정의와 사랑과 희망을 말하는 자. 그것들을 지키고 타인으로 하여금 그것에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 자. 캐빌 프로빈스 역시 그렇기 때문에 해일을 사랑했다. 사랑하고 아꼈으며, 그런 탓에 당신에게 통증을 새겨야만 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이 되는가. 당연하게도, 너무 당연하게도 기준이란 주관적인 탓에 정립할 수 없는 개념 중 하나이다. 다만, 정의와 사랑과 희망을 말하는 마법소년에게 기준이라 함은 너무나도 확실하지 않던가. 해일이 전한 희망에 그녀 역시 영원을 약속했으니, 당신은 그를 지킬 의무가 있다. 편안함과 무료함을 뒤로 하고, 육신과 정신과 생명을 담보 삼아 그녀에게 영원한 행복을 쥐어줄 의무가 있다는 소리. 해일은 그 희미한 희망 따위를 지키기 위해 아득바득 살아남았으며, 그것을 제 가치로 여긴다⋯ 라는 게 캐빌 프로빈스의 인식. 그런 확신에 의심치 않는다. 더욱이 현실 속에 살아있지 않은 의식을 깨워 지상으로 끌어내린 채, 해일과 리피에게 제 사랑와 의지 따윌 넘겨줄 수 있는 자격을 얻어냈으니 그 분노가 스스로 어색하면 안 되는 게 아닌가⋯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것도 정도껏 해라,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머리를 얻어맞았다. 머리라는 건, 아무리 단련해도 어쩔 도리가 없는 인간의 약점 아니던가. 머리가 울린다. 두개골 속의 뇌가 뇌수 사이서 요동친다. 잠깐 시야가 아득하니 좁았다. 가까스로 다리를 뻗어 중심 잡았으나, 무시할 수 없는 데미지가 있더라. 흔들리는 상념 사이로, 허무로 텅 빈 새파란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그럼, 나 역시 그것을 바라본다. 무엇을 느낄 수 있었는가, 캐빌 프로빈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 저 녀석은 해일이 아니지 않던가. 아군의 턴이다. 

구태여 능력까지 쓸 필요는 없었다. 말하자면, 쓰고 싶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당신은 제가 아끼고 사랑하는 해일이 아니던가. 아니라고 말하기는 하여도, 그 육체는 해일의 것이었기에. 결국 맨주먹으로 그 몸의 중심, 그러니까, 복부를 강타했다. 이걸로 또 한 대, 턴 종료.

⋯ 닥쳐, 현실 직시 같은 게 지금 중요하냐?... 해일, 해일, 해일. 야, 해일. 지금 중요한 건 너랑 나 따위가 아니라, 리피라고⋯ 알겠냐, 제발 좀 알았으면 좋겠는데.